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진행 (문단 편집) ==== 교수들의 시위 ==== >'''學生(학생)의 피에 報答(보답)하라!''' 시간이 지날수록 소강되던 시위를 되살린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였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 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19일에 있었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섰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총 앞에서 의연히 행진했고 결국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신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25일이였냐 하면 매달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서[* 은행이 전산화되기 이전에는 월급이 계좌이체되는 것이 아니라 수령자가 직접 봉투에 담긴 두툼한 현금으로 받았다.] 이 때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봉급을 핑계로 당국의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처음에는 많아봐야 50~60명 정도만이 모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인 교수들은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자기들도 이렇게 많이 모일 줄 몰라 놀랐다는 후일담이 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대학가 사이에는 "교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벼룩을 일렬로 세우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당시는 유교 문화가 훨씬 진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다. 조선시대 식자층은 대부분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로서 당연하게 여겼다. 물론 벼슬하는 일은 거절하는 것이 청빈의 상징으로서 좋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관직을 해먹는 것과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가령 남명 [[조식(조선)|조식]]은 벼슬은 전혀 하지 않았으나 상소는 여럿 올렸다.] 그만큼 교수들 사이에서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꺼렸다는 이야기이며, 교수들이 직접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4.19 혁명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교수들이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에는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그 중에 몇 명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 258명 ||[[파일:external/aaaebd66fc2792a3a22e05e7043599abf571373fceba0cd81fd84e569afdb261.jpg]]|| >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 >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는 이전의 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위에 인용된 각 학교별 선언문에서 보듯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교수들의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며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에다 [[애국가]]까지 제창했으며 기습시위였는데도 '''단 한 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대학 교수는 21세기에도 대단한 직업이긴 하지만 당대에는 정말로 엄청난 직업이었다. 무학과 문맹이 흔했고 의무교육이 겨우 도입되던 그 시대에 국내외 대학에서 각 분야를 전공해 학위를 딴 사람들로서 한마디로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당시 1~3대 대선을 보면 "박사"라서 불린 이승만을 제외한 후보들의 호칭이 전부 "선생"이었는데 이승만만이 유일하게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오전 7시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윽고 9시경에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는가 하면[* 그 자리에는 4.19 혁명기념도서관이 설립되었다.][* 김정렬 국방장관은 1개중대를 더 보내서 이기붕의 집을 경비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실상은 이기붕의 집을 경비하고 있던 기존 병력마저도 철수해 버렸다고 한다. 사유는 정확히 알수없으나 시위대의 규모가 워낙 커서 현장지휘관이 철수해 버린 게 아닌가라는 추측은 있다.] 같은 시각 45분경에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었다.[[http://pds16.egloos.com/pds/200911/16/75/f0020275_4b002cb180049.jpg|#]][* 현재 그 자리에는 [[김구]] 동상이 서 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 개신교계와 보수세력, 뉴라이트들이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정치깡패 보스들의 집을 공격해 부수었다. 이제 점점 상황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옭아매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